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시 프랑스 (문단 편집) ==== 레지스탕시알리즘 ==== 비시 프랑스 이후 정권을 잡은 드골파 우익들[* 주류 공산주의자들도 이를 묵인한 경우도 있다. 하지만 실제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던 공산주의자들일수록 이런 미화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당시 상황에서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.]은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들이 모두 나치 정부에 맞서 싸웠다는 생각을 밀기 시작한다. 이로써 한 국가에 한 시기에 대해 다른 기억을 묵살하면서 유일한 공통된 기억을 가지게 되고, 이 기억을 레지스탕시알리즘(Résistancialisme)[* 앙리 루소(Henry Rousso, 프랑스 역사학자)가 처음 사용한 용어.]이라 명명한다. 프랑스가 레지스탕스로 똘똘 뭉쳐있었다는 생각으로, 이 생각 덕분에 1945년에 프랑스는 패전국의 협력국에서 승전국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. 전쟁을 겪은 세대가 엄연히 살아있음에도 이런 기억의 변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국민, 정부와 역사가들의 암묵적인 동조 덕에 가능했다. [[http://www.ddanzi.com/ddanziNews/196632275|참고]] 역사가 로베르 아롱은 레지스탕시알리즘을 변호하기 위해 책 "비시의 역사"(L'histoire de Vichy, 1954년)에서 [[창(무기)|창]]과 [[방패]]의 설(Théorie de bouclier et de fer)를 정립한다. 페탱은 프랑스를 보호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패 역할을 했고, 실제 프랑스는 레지스탕스의 이념으로 뭉쳐있어 프랑스 국민과 레지스탕스는 창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. 그렇다고 섣부르게 프랑스인들이 로베르 아롱의 견해를 공유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. 1966년의 조사에 따르면, 프랑스인들의 51%만이 페탱의 결정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보았다고 한다. 다시 말해, 페탱을 두둔하는 인구가 절반이었고 비난하는 쪽이 절반이었다는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